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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8일 금요일

감동이 있으나 감동을 못 느끼는 통일교인

감동이 있으나 감동을 못 느끼는 통일교인

2013.11.08. 00:21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2775

 
감동이 있으나 감동을 못 느끼는 통일교인
 
 

우리 교회에는 감동이 가득하다. 작은 시골 교회일수록 소박한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감동은 자신을 넘어서는 순간에 일어나며, 전체에 도움이 되는 행위로 귀결된다.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신앙적 모토로 삼고 있는 통일교에 감동이 넘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일주일 내내 직장과 가정사로 힘겹게 일을 해 온 식구에게 있어 일요일은 휴식과 에너지 충전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이른 아침의 교회 안에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식구가 반드시 있다. 영하의 온도에 난방이 없는 교회 성전을 추위를 떨쳐내며 청소하는 식구, 맛있는 점심식사를 위해서 반찬을 만들고 있는 식구, 주일학교 예배를 위해서 열심히 교재를 준비하고 있는 식구, 예배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찬송 연습을 하는 성가대원들, 더운 여름에 옷을 땀으로 적셔가면서 설거지하는 식구, 교회 발전을 위해서 새벽 4시부터 썰렁한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고 있는 식구 등등...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정성은 감동 그 자체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에는 감동이 매우 적다. 왜 그런가? 감동을 감동으로 느낄 수 있는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가치관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치의 대상을 어떤 한 존재에게만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념만 있고, 감성은 메마른 식구들... 모든 가치를 문선생에게만 몰아주고, 나머지 식구들은 탕감을 치루고 있는 죄인으로만 여기는 극단적으로 왜곡된 가치기준이 교회 내의 생동감과 온기를 빼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을 위해서 신을 몰아내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감동을 위해서 실재의 감동을 보류하고 있는 현상이다.
 

선진 사회, 즉 의식이 깨어있는 사회에서의 봉사 행위는 충분히 존중받고 사랑받는다. 봉사가 개인과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사실 그대로 보고 인정하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봉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봉사의 수혜 체험이 있기에 봉사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봉사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동료의 봉사를 그만의 탕감수행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탕감을 수행하고, 나는 나의 탕감을 수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본 식구들이 자신의 삶을 다 바치고 순교의 길을 가더라도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주위 식구들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죄의 댓가를 치루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논리는 이렇게 비뚤어진 가치기준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얼마든지 가혹하게 사람을 부려먹어도 정당한 아벨이 있고, 아무리 힘겹고 불평등해도 무조건 따라야하는 수많은 가인이 존재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극히 제한적인 의미로 적용해야 하는 이런 관점(논리)을 모든 관계의 중심에 적용하게 되면서부터 잘못된 상황을 가중시켜왔다.
 

봉사는 사랑이다. 봉사는 순수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것이며 신앙적, 인격적 성숙의 징표이다. 그런 행위의 배후에는 선행자(조상)의 덕의 축적이 있으며, 살아있는 신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래의 삶의 방향이며 신앙의 목표이다. 그것은 천국활동의 기본 요소이기에 미리 보는 천국이다.
 
그러므로 봉사를 하는 식구가 진정한 의미의 아벨이며, 선행자이다. 길잡이이다. 그런 식구를 경외하고 그런 행위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해야한다. 그가 무엇을 넘어섰는지, 무슨 기도를 하며, 잠재의식에는 어떤 요소들이 깔려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신께 감사해야한다. 봉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된 현실을 크게 감사해야한다. 그런 삶이 곧 구원된 현상이며, 천국사회에 진입한 것임을 인정하며 행복해해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큰 하나님, 보이지 않는 큰 예수와 참부모를 보지 말고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작은 하나님, 작은 예수와 참부모를 보아야한다. 문자 속에서 진리를 찾지 말고, 봉사하는 사람의 따듯한 손길과 자애로운 눈빛에서 진리의 구현을 발견해야한다.
 

살아있는 ‘참’에 감동하고 격려하는 것이 곧 참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것이다. ‘참’이 없는 사람은 ‘참부모’역시 알 수 없다.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신의 참을 보아야하며, 타인의 작은 친절 속에서 참을 보아야한다. 설교도 살아있는 참(감동)의 시작과 귀결을 진술하여야하며, 설교자 자신이 감동스런 삶을 구현해야한다. 감동이 없는 한 감동은 복제되지 않는다. 수십년 동안 일본 식구들이나 헌신적인 식구들의 감동스런 행위를 보아왔으면서도 닮지 못한 한국식구들은 이런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있어야한다. 감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나, 곁에서 함께 감동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다. 감동은 살아서 움직이는 ‘삶’ 전체 속에서 연꽃처럼 우러나는 것이다.
반면에 종교적 이념이나 의식에 매여있는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끝없이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리고 남은 작은 에너지를 막연하고 허구적인 이상에 의지하며 소진한다. 그들에게는 신도 없고, 사랑도 없고, 삶도 없다. 종교만 있다. 또는 걸러지지 못한 에고(ego)만 있다.
 

“ 신은 살아있는 것에 함께한다. 활동하는 존재의 힘이다. 신을 만나려면 감동을 만나면 된다. 크게 느끼는 감동은 곧 신을 크게 느끼는 것이다. 감동이 신이다”
 

감동은 우리 교회 내에 가득하며, 삶을 이루는 모든 곳에 널려있다.
스스로도 작고 큰 감동을 수없이 창조해낸다. 감동을 보는 눈을 키우고, 감동에 반응하는 감성을 키우자. 천국은 감성이며 감동이다. 행복의 중심 요소 역시 감성이며 감동이다.

                                    

 
00:43 new
문선생 이라고 호칭하는 하는 당신은 누구요???
우리 식구들은 참아버님을 문선생 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신은 식구가 아니면서 헛소리 하지 마시요
 
02:17 new
식구요? 아직도 우리 교회에 식구가 남아 있소? 교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사람들만 남아 있지요.
난 입교할 때부터 문선생이라 불렀소.
호칭은 부르는 사람의 자유인데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시건방진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06:55 new
글의 내용에 의견을 제시하시지
호칭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이
참 한심할 뿐입니다
 
08:17 new
축복가정 수준을 너무 모르는군요. 축복가정이 1억은 넘을텐데 참부모로 부르는 사람이 백만은 되려나?
 
08:31 new
누구앞에서도 떠떳하게 참부모로 고백하는 사람 만명 안된다에 한표.
 
09:38 new
일본에만 60만명있다고 도쿠노회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는데...ㅎㅎ
 
10:53 new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하고 참부모라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듯...
난 5천명도 안된다에 한 표에요.
 
10:55 new
무슨 축복가정이 1억이 넘다고라???
 
 
05:59 new
공감 합니다
 
 
09:51 new
전체적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며, 현실을 볼 줄 아시는 안목으로 글을 쓰셨습니다만!
봉사를 한다고 아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봉사하는데, 너는 왜 안하냐? 이말은 쉽게, 나는 헌금 내고, 훈독, 정성 열심히 하는데 넌 왜 안하냐? 그러니 넌 나보다 못한 인간이다. 한국사람도 그렇고 일본분들은 더 그러실 듯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10:11 new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자신(교회포함)도 모르게 화석화되어 가는 현실을 봉사,감동등의 언어로
표시한 듯(개인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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