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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사회적 가치와 역할로 본 인간의 유형(類型)

사회적 가치와 역할로 본 인간의 유형(類型)


2014.03.14. 23:48 http://cafe.daum.net/W-CARPKorea/Umxh/3834       



             사회적 가치와 역할로 본 인간의 유형(類型)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당장에 대두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느냐는 자연스러운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험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로서는
기껏 할 수 있다는 것이 社會的이란 수식어를 달고 그것마저도 부족하여 役割이란 좀 더
구체적 용어를 보태어 소신의 일단을 표현하고자 한다.
 
거기에다가 이것은 공인된 정설도 아니고 완전히 필자의 일방적 견해일 뿐이니 다소
껄끄러움이 있더라도 정중히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나는 사회적 가치로 본 인간의 類型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싶다.
 
첫째,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인간들, 다시 말하면 있어서는 안 될 인간들이다.
 
성서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막14/20)”고 표현하신대로 시대적 의미로 보나 역사적 의미로 보아 무가치한 정도가 아니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가 있는 것이다.
작게는 <공공의 적>이라고 부르는 흉악무도한 사회적 범죄자들과, 크게는 국가와 인류 앞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인물들을 말한다.
 
둘째, 있으나마나 한 인간들이다.
 
역시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11/17), (눅7/32) 고 하신 말씀대로 있으나마나한
그야말로 살아 있으나 죽은 시체덩이 같은 인간이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무식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칭 지도자인양 거드름피기를 좋아하는
얼치기 유식자들도 얼마든지 포함 될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의적 판단능력, 즉 최소한의 내면적 양심의 소리보다는
대중적 견해와 실리적이고 무사안일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유형을 말한다.
 
셋째, 평범한 사람들 즉 보통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大衆, 또는 凡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비록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억울한 사정을 듣게 되면 분개할 줄 알고,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되면 함께 염려한다. 물론 여유가 없더라도 베풀고 참여할 줄도 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자신의 판단을 중히 여기며 최소한 양심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행동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어떤 의문이나 문제가 발생할 시에 그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과 배경 및
장차 미칠 2차적이고 3차적 영향보다는 短問 卽答식의 사고를 선호한다. 이 유형에 속하는
凡人(대중)들의 공통된 특성은 자신들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추어 好, 不好를 쉽게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곧 대중심리의 애매한 공동책임으로 넘겨버리는 습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넷째, 철학적 사고를 가진 유형의 인간들이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卽答식 사고보다는 왜(why?)라는 문제의식에 몰두하는 유형을 말한다.
즉 나타난 결과보다는 그 원인(reason)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비록 그 문제가 주관적 문제의 범주가 아니고 얼핏 보기엔 객관적 사고를 요하는 것 같으나
그것과 연관 되어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전제로 다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란들을
말한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보통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공상가 혹은 비생산적인 몽상가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회가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세계가 되었건 역사는 이들의 사고를 기반으로 하여 사상적, 경제적, 과학적, 문화적, 정치적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던 밑거름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이러한 철학적 사고의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보통사람의 3%도 채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다섯째, 지도자형 인물 유형이 있다.
 
소위 말하면 어떤 조직이나 사회나 국가의 leader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지도자형의 인물은 반드시 어느 한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대중적 심리를 파악함은 물론이고 철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꿈과 이상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실현시키어 전체의 복리를 구가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우리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지도자형의 인물도 그 범위가 동일하지는 않다. 경제적으로는 재벌회사의 창업 leader가 있는가 하면 정치적으로는 국가를 창국하거나 재건한 건국 leader와 과학이나 예술
분야의 탁월한 leader도 있다. 더 나아가 민족과 국가와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구원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한 세계적 종교 창시자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 범위와 크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따라가는 무리가 아닌 끌고가는 형의
인간유형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형의 인물은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된다. 타고난 천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보통사람들뿐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개인을 희생해서라도 전체의 행복을 이루기 위한 뜨거운 열정과 사명에 불타는 철학과 신념과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내적 자세를 갖추지 못하면 한낱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정치꾼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역시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이러한 지도자형 인물은 철학적 사고를 가진 인물의 1%도 안 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다섯 가지의 사회적 가치의 인간의 유형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주견에
불과 하다. 다만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나는 어느 유형에 속하는가?>라는 자문자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내가 다른 유형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긍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가를 솔직히 분석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선의의 공적이고 이타적인 목적을 가지고 별다른 주변의 도움 없이
동분서주하게 되면 반드시 그 숫자가 적든 많든 다정하게 환영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는 그럴 의욕도 현실적인 기반도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무형의 정성과 기도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경제적 비용과 시간적 소비가 요구되어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 조직이나 어느 때나 동질적 요인과 차별적 요인이 있게 마련이다.
일상적이고 평화적 상황에서는 의도적으로 차별적 요인을 강조하거나 드러나게 하려들면,
반드시 그 조직은 필연적으로 균열이 가게 되고 화목을 해친다.
그와는 반대로 의식과 심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무사태평한 상황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차별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가치와 역할로 본 인간유형이 반드시 다섯 개만
되란 법은 세상에 없다.
다만, 세 개가 되던 네 개가 되던 아니면 각 중간단계를 포함시켜 열개가 되던 분명한 것은
사고의 폭과 역할의 한계가 차별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고 어느 것이 더 낫고 모자라고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능력과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2014. 3. 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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