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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일 일요일

그럼, 참아버님도 하나님이신가? (축복2세의 형지님 지지 발언: 마지막 글 3-3)

2015.05.02. 23:36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5972       

“이제 엄마가 말할래?”


한국말로 설교하던 문형진님이 말을 맺으며 부인인 이연아님에게 한 말입니다.  좀 흔하지 않은 경우죠, 목사가 설교단상에서 사모에게 하는 말로는.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한국 식구님들은 다 이해했습니다. “엄마”는 참아버님이 생전에 참어머님을 부를 때 쓰시던 호칭인데, 그걸 옆에서 듣고 배운 아들이 자기 아내를 그렇게 정감있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죠. 형진님은 미국에서 태어나 거기서 겨우 한국말을 배웠는데, 영어식 발음이 다 굳어진 후에야 한국에 오셨습니다. 그때부터 한국말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쓰기 시작했으니, 아무래도 그의 한국말이 좀 어색한 것입니다. 말하는 내용은 수준이 높아 어른 같은데, 한국말 표현은 마치 어떤 다 큰 교포 아이가 말하는 것 같아, 듣는 식구님들은 묘한 대조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신기했던 것은, 그런 어색함은 금방 익숙해지고, 조금 있다, 형진님의 말에 깊이 빠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시간을 보니 한 40분이 훌쩍 지났더군요. 내용도 사실은 그리 특별한 것들은 없었거든요. 90%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이게 참 신기했습니다.  문득, 오래 전에 어떤 통일신학자 한 분이 능숙한 언변으로 새로운 내용의 본체론 한 강좌를 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뛰어난 언어 사용과 내용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한 10분 지나니까, 난 머리가 멍해지면서 그 뒤론 졸음을 참느라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금방 이해되지 않는 이 두 사실을 비교해 보면 뭔가 중요한 진실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부인 연아님은 형진님과 성전교회에서 공동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의 바톤을 이어받아 자신의 경험담 하나를 이야기 했습니다.  훨씬 능숙한 한국말이었는데, 형진님 설교뒤에 바로 나오니, 앞에서 뭔가 부족했지 않나 하는 느낌이 사라지면서, 두 분이 식구들앞에서 서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아님이 마지막에 감정이 복받혀 좀 울먹이시더군요.  그런데,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멀리서 유튜브로 듣고 있던 나의 눈에 눈물 서너 방울이 고였습니다. 이것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두 분 말하는 것이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은 느껴지는데 그게 뭔지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지켜보았죠.  그러다, 결국 알아냈습니다.


이 두 분은 말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원리적 표현으로는 “심정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에 비해, 그 통일신학자는 강의를 머리와 입만 가지고 하면서, 충실하게 원리 정보 서비스를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옆에서 듣고 있자니 졸릴 수밖에요. 그리고, 나는 머리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상대가 가슴으로부터 말하니, 듣는 나도 가슴이 열리며 정말 살아있는 교감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참아버님도 생전에 말씀을 가슴으로 하셨습니다. 당신 말씀 하시는 것을 처음 직접 들었을 때 난 좀 당황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북 사투리가 많이 섞여있는 옛날 발법인데다, 말이 빠르시고 발음을 가끔 흘리셔서, 현대 한국어로 틀이 잡힌 내 언어감각으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진지함, 집중력, 유모어, 식구들에 대한 애정, 등등의 언어 외적 요소들은 바로바로 내 가슴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속도가 달리 흐르는 시간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소위 “보디 렝귀지”라는 것인데, 말보다는 얼굴표정이나 기타 몸짓들이 그 사람의 진실을 더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본능적으로 상대의 보디 렝귀지를 정확하게 읽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말만 그렇게 하는 지, 아니면 진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는 언어를 초월해 몸과 가슴으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전 형진님과 연아님이 무척 솔직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마음속으로 가장 지지하는 것은, 두 분의 교리적 입장보다, 당신들의 솔직함과 순수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어서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솔직함과 순수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역시 가슴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입이 없으시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 신앙이 자라는데 독이 되는 가장 나쁜 습관은 “자기 기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일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합리화를 완벽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가령, 형진님의 분파 활동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참어머님에 대한 불효이기 때문이다," 혹은 "섭리 전체의 대의를 위해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속마음은 사실 "저 사람이 괜히 싫어서" 일 수 있습니다.  가령, 겉만 노란한국인이지 속은 허연 미국인인 "바나나" 이미지가 내 속을 거슬린다든지 말입니다. 아니면, “교회가 그러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은데, 왜 괜히 더 문제거리들을 만들어, 세상 창피하게?” 그간 공들인 내 삶의 시간들이 아까우니까, 화가 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때,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화가 나는 진짜 이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솔직하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진심이 아닌 신앙에 왜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하죠?  그런경우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자기기만을 하면서까지 숨기고 싶은 진짜 문제점들이 뭔 지에 더 관심이 있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바로 그런 심층심리적 이유들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가슴을 열지 못하는 진짜 이유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성숙은 매우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장 장애를 어떻게든 치유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문제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 해결할 수 있도록, 그것을 자극하는 상황들을 계속 만드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솔직하고 진지한 분이십니다.


이 마지막 발언에서, 저는, 지금 통일교인들의 귀를 거슬리고 있는 문형진님의 <그리스도 사상>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간의 공부를 통해 전 이 주제에 대해 최대한의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새롭고 긍정적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기발한 효과를 준다해도,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지적인 접근 방법들은 하나님께 직접 가슴을 여는 사랑의 방법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두겠습니다. 심정은 분명 원리에 앞섭니다.  저의 마지막 본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3. 참아버님은 메시아가 아니라 그리스도 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희랍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직역한 말입니다.  “기름을 덮어 쓴 사람”이란 뜻인데, 원래 히브리어의 함의에 따라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왕식에서 선지자를 통해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부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사도들이 유대인들을 전도할 때,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였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의 복음이 희랍세계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때, 번역어 “그리스도”가 등장했고, 이를 마치 예수의 별명처럼 자주 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장 인기있는 예수의 호칭으로 일반화 되었죠. 현재,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그런데, 이 고유명사 "그리스도"를 원래의 일반명사로 바꾸어버린 인류 역사 최초의 기독교계 지도자가 바로, 내가 알기로는, 문형진님입니다.


제2의 레버런 문, 형진님은 ‘그리스도는 꼭 나사렛 예수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그리스도이지만,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것입니다.


놀라셨나요? 네, 조금 과장했습니다. 사실은, 기독교계 이단이나 이방종교들, 즉, 영지주의나 기독교 신비주의내에서는, 그리스도를 넓은 의미의 일반명사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즉 카톨릭이나 개신교에서는, 절대 그렇게 쓰지 못 합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외에 다른 존재를 그리스도로 규정하면 바로 이단이 되니까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그리스도라는 씨인데, 그걸 바꾸면 씨가 달라지니까 "이단"이 되는 겁니다.


형진님은, 과연, 그 흔한 “이단종교 창시자들 중 하나”일까요, 아니면 “혁명적 기독교 신학의 시조”일까요?


제 답은 후자 입니다.


우선,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처음엔 물론 같은 뜻이었지만.  메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정일체의 정치수반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 조상 단군왕검 같은 존재이죠. 아직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전근대적 시대에, 최고의 제사장이 국왕도 겸직하는 풍습속에 존재했던 원시적 관념입니다.  그러니까, 원시 유대인들이 했듯, 우리가 참아버님을 신정일체 정치수반 정도로 규정하면 우리 신학은 고대로 후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천일국에서는 아버님을 ‘천일국 진성덕 황제’로 칭하는데, 메시아 냄새가 무척 나지요?  고등한 신학 정립을 위해서는 이런 면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래 메시아와 동의어 였던 “그리스도”가 일대 변신을 하는 역사적 사건 하나가 주후 200년께 유럽에서 발생합니다.  당시 기독교 대중 철학자였던 터툴리안(Turtullian)이라는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과, 나사렛 예수, 신의 성령, 셋의 관계를 규정하는 논문에서, “세 인격이 하나의 실체” 라는 표현을 쓰고 그걸 신학적으로 뒷바침합니다. 즉,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신격화를 시도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신관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그런 황당한 생각을 했는 지는 모르지만, 이 사상은 나중에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론이 되었으며, 기독교가 자신과 남의 종교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되지 못 합니다. ‘서로 다른 세 존재가 하나다’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난 아마 한 달간 머리를 쥐어 짯을 겁니다. 그러다 결국 포기했어요. 이건 이해가 불가능한 외계 사상이다는 것이 저의 현재의 생각입니다. 삼위일체는 믿는 거지,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삼위일체 신학에서,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라 “신” (神) 입니다.


아무리 신의 대신자라고 해도 태생적으로 인간일 뿐인 메시아와는 그 차원이 다른 초월적 존재입니다. 신을 상징하는 우상이나, 신적인 어떤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다는 말입니다.  보통 삼위일체하면, 우리는 "삼위"에 신경을 쓰는데, 이 표현의 강조점은 뒷 말 "일체"에 있습니다. 여전히 유일신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성신을 자꾸 하나님과 다른 존재들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분 모두 하나님이시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도 일반명사로 쓰고 있는 겁니다. 단지 야훼 (YHWH) 를 가르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궁극의 절대신"이란 뜻을 가진 일반명사로서, 존재의 종류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고 있습니다. 즉, 멍멍이는 동물이고, 을주환은 사람이며, 루시엘은 천사고, 예수나 야훼는 하나님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어머님이 '나는 하나님이다'고 말씀 하셨을 때는, '내가 세상을 창조한 야훼'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그 분과 같은 종류의 신'이라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들은 신의 아들 딸이다'는 말을 기독교에서 흔히 하니까, '아버지와 딸이 같은 종류'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큰 어폐는 아닙니다. 어떤 호칭이 이해에 혼선을 빚는다면, 그 낱말을 고유명사로 쓰는 지, 일반명사로 쓰는 지를 확인하면 혼선을 이렇게 쉽게 풀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참아버님도 하나님이신가?”에 대한 답도, 일반명사로서는 “예스,” 고유명사로서는 “노우” 입니다. 이 답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한 선배식구님의 간증에 따르면, 본체론을 듣고 있던 참아버님이 “내가 왜 하나님이야!” 라고 짜증을 내셨답니다.  물론, 본체론 강사는 그때 "하나님"을 일반명사로 쓰고 있었던 것이죠.  형진님의
설교에서도 참아버님과 하나님은 분명 다른 존재로 등장하니, 이 질문에 대한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합니다.


하여튼, 그리스도는 신이지만 "원래 하나님 자신"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존재이니 둘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데, 삼위일체론은 그것을 부자지간으로 설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갖는 첫번째 의미는 "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딸)" 입니다. 신의 아들은 신과 같은 종류이므로 역시 신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만 선포한 것 뿐 아니라, '나는 신으로서 영생하는 존재'라는 것도 증명했습니다. 즉, 자기 몸이 분명히 죽은 상태인 것을 먼저 확인시킨 후, 다시 부활하는 기적을 보인 것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 부활”의 신화인데, 예수가 그런 의도로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영생을 증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니 영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왜, 꼭 한번 죽어서 부활하는 수고를 했을까?  그것은 영생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그리스도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같은 신이라고 가정해보죠. 그럼, '저를 영생케하는 생명시스템을 파괴해버리면 영생이 불가능해지지 않을까'는 궁금증이 나오겠죠? 그러니까, 그 궁금증을 풀려면 그 신을 한번 죽여봐야 합니다. 그래도 살아나면, 그때 영생성이 확실히 증명이 되니까요. 이렇게 예수는 십자가에서의 부활을 통해 자신의 영생성을 증명했습니다.


이 두 전제를 합치면 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영생하는 신의 아들 딸이다"


삼위일체론에서 그리스도는, 성부에 이은 제2위 "성자" (Holy Son) 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제가 정의한 그리스도의 의미와 일치합니다. 교회 가정맹세에서, 우리는 "성자의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하는데, 이런 신관과 비슷한 관점이라면, 우리는 매주 "그리스도"가 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위치니까 느낌상 별 것 아닌 자리같으나, 이런 신학적, 철학적, 도덕적 관점에서는, 세상 그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 더 위대한 자리입니다.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최고 지존의 정체성이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 딸은 신과 같은 종류임으로 자신들 역시 "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일요일, 천주교나 개신교에 가면 정면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천주교의 십자가에는 피 흘리리며 죽어가는 예수가 못 박혀있고 (내가 보기엔 언제나 끔직합니다), 개신교의 십자가는,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이제는 텅 비어버렸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십자가 취향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자기들의 십자가를 날마다 보면서 "영생하는 신의 아들 딸"을 소망합니다. 이게 그들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리 혐오하는 십자가 사형틀에는 이런 위대한 종교사상이 숨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인간을 신과 동일하게 규정하는 “그리스도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진화한 최고의 종교사상입니다. 우주의 궁극은 신이니까, 인간이 신의 자리에까지 올라가면 더 갈 때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기독교 신학의 한계는 “나사렛 예수만이 그리스도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문형진님의 통일신학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형진님은


“문선명 선생 그리스도다”


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신학적 이해 이전에 예수의 존재는 신비였습니다, 물론 정통 기독교내에서만 말입니다. 인간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춘 정말 특이한 존재로 믿어졌던 것이죠. 그는 태초에 하나님 창조 사역에 직접 동참한 “로고스”라는 존재가 성육신한 존재였다고 믿어졌습니다. 그야말고 신비죠.


그런데, 이 분이 십자가에서 부활한 후 약 1900년이 지난 어느 날, 저 머나먼 극동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한국, 그것도 정주라는 소박한 동네에 나타납니다 -- 당시 “문용명”이라 불린 14세 소년 앞에. 그리고는 이 신비한 그리스도 사상의 진실을 밝힙니다:


‘난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너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알고보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다. 그러니까, 너도 나와 같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나처럼 그리스도가 되어라.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위해, 내가 끝내지 못 한 일을 대신 해주기 바란다’


라는 종교적 계시를 준 것입니다. 예수는 생전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 (마태 12:50) 라고 하는 등, 주위 인간들과 자신을 계속 동일한 종류로 취급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이런 식으로 계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까, 틀렸던 것은 중세 카톨릭 교회였죠. 우리가 예의상 말은 않지만, 속으로는 다 공감하고 있듯이,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위해 예수를 신격화했던 것입니다, 마치 조선인민공화국이 김일성에게 했듯 말입니다.


어째든, 예수의 이런 계시를 받은 소년은 실제 그 일을 합니다.  결국, 그는 나중에 “문선명 그리스도”로 변신했고, 자기를 따라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가 되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명소년의 부활절 계시> 이야기 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비로소 세계적으로 이루지는 성약의 종교 <통일교>를 탄생시킨 신화입니다. 이런 일이 정말 있었는 지, 또, 꼭 내가 말한대로 사건이 전개됐었는지는, 종교에 있어서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종교는 반드시 창교 신화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건국신화 같은 게 하나 있어야 한단 말이죠. 그래야, 그걸 중심으로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일관된 신학 체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 신화를 통해서 이 종교가 무슨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지, 그 메세지가 인류 전체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 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타락은, 쉽게 말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본래 관계, 즉, 부자지연이 깨진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복귀는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기본 목적입니다.


첫째 종교, 유대교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간신히 "주종 관계"로 시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신이 미리 정하신 율법을 (가령 십계명같은 것) 우리들이 충실히 생활화 하기만 하면,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래 전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 곧 구약입니다.


둘째 종교, 기독교는 만년 종으로 살면서 죄의 값으로 사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 앞에, 예수가 '영생하는 신의 아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준 희망의 가스펠이었습니다. 그를 진실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양자 관계" 비슷한 것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약속, 신약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종교, 통일교는 그간 나사렛 예수에게만 나타났던 "영생하는 신의 아들"의 기적을 전세계적으로, 인류 보편적으로, 확대하려는 종교 운동입니다. 이것이 성공해야, 그 기나긴 복귀섭리를 통해 하나님이 일편단심 목적하셨던, 모든 인류를 다시 친자식으로 회복하는 "친자 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약속들을 이루는 복귀의 종착역, "성약"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성약의 종교라고 하지만, 교회의 실제 멘탈리티가 어떤 지를 볼려면, "일반식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식구들을 하나님의 친자녀라고 보나요, 아니면, 편의상 양자나 양딸 비슷한 것으로 보나요? 혹은, 아예 종들로 취급 하나요 (특히 일본식구님들 같은 경우)?  각자가 가진 멘탈리티에 따라, 우리가 물리적 시간은 성약시대를 살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구약이나 신약시대를 살 수도 있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창하게 논리를 전개했지만, 결론은 별거 아닙니다 --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딸" 사상입니다.  위대한 사상들은 알고보면, 대개, 보편적 이성과 일반적 양심을 다시 확인하는 편안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위대하고 영원한 인류의 고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사상은 너무나 보편적인 사상이며,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긍정적 신학입니다.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이념화 될 위험이 없으며, 따라서 다른 종교들과 충돌
하지도 않습니다. 인류 모두를 최고의 가치로 규정해 버리기 때문에, 누가 더 낫고, 못 나고 싸울 건덕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보편적 신학은 모든 신학을 어울리게 할 수 있는 조화의 중심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전, 통일교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독교 전통을 깊게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임마누엘 예수외에 다른 존재를 역시 그리스도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신학적 해석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해석은 실로 우주적인 것입니다.


통일신학속에 숨어있는 이 새로운 <그리스도 사상>은 최고의 인간존엄 사상이며, 인류 문명의 극치이자, 영원한 희망의 가스펠 입니다. 종교적 논리상, 이 이상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막내둥이 통일교가, 스스로 의도했던 안했던,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앞에서 ‘문선생님도 그리스도다’ 라고 하면 바로 이단이 되지만, ‘문선명선생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잠정적 그리스도요, 영생하는 신적인 존재들이다’고 하면, 그 보편성과 타당성 때문에, 이들이 비판하기가 매우 힘들어 집니다.  상대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러니까 우리 통일신학이야말로 가장 진화한 기독교 신학이다’고 치고 들어가면, 우리를 결코 만만히 보지 못 할 것입니다.  더이상 이만희의 "신천지"같은 한국적 신흥종교가 아니라, 우리 교회는 세계 기독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한 “성약의 기독교”로 이미지를 변신할 수 있습니다.


“참아버님은 기독교를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해진 기독교로서의 통일교는, 여전히 기독교이지, 다른 종교일 수가 없죠. 이렇게 기독교로 새로운 아이덴티디를 갖게 되면, 2천년간 그들이 발전시켜온 신학적, 철학적 지혜와 운동의 노하우들을 몽땅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지금 형진님이 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다, 선명 그리스도의 어록들을 새로운 복음서로 추가하면 통일신학은 막강한 완전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깨닭은 가장 중요한 신학적 해석이기에, 이 글로써 그에 대한 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제가 아는 원로식구님 한 분은 평생 공직에서 뜻을 위해 헌신하다 은퇴하셨는데, 교회가 재정적 여력이 없어 그 분의 은퇴자금에 단 한 푼도 보태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주는 최저 생계 보조금으로 겨우 양로원에 입원해, 지금은 하루하루 목숨만 유지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연로하셔서 거동도 잘 못 하시니 교회도 자주 못 가고,  찾아오는 식구님들도 점점 뜸해지는데, 세상 노인들과는 잘 사귀시지도 못 합니다. 가끔 뵈러가면 무척 반가와 하시는데, 조금만 있으면, 제가 옆에 있는 지을 깜박 잊으신 듯 멍하게 어떤 생각들에 빠져 계십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난 절대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각오입니다. 정말 우리 신앙공동체가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나요?


난, 물론, 이 분의 불행한 삶의 말년을 교회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결정한 희생이었고, 노후 보장에 대해 교회가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패턴들이 자주 발견된다고 하면, 교회가 신도 개개인들에게 미리 주위를 주는 정도의 양심과 도덕성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개 우리 교회 입교하시는 분들이 열정적이고 순수하시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훈련되지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 ‘이 세계를 몽땅 뜯어 고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분들이래야 통일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솔직히, 이 분들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 적응해 살기 힘든 사람들인데, 이제 교회에다까지 자신의 시간과 돈과 정력을 바쳐야 하니, 세상에서의 경쟁력이 더 떨어질 밖에요.


이 점에 주의, 현장의 목회자님들이 그런 대책없는 식구님들을 보거들랑, 이 분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생계와 노후를 준비하시도록 격려하고, 무리하게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자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걸 하지 않는 교회는 비윤리적인 조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비합리적인 교회 문화에 염증을 느낀 것이 내가 타 종교들을 공부하는 계기가 됐고, 최근 형진님의 성전교회 독립 활동을 보면서, 신앙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종적 결론으로, 내가 우리 교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가 당대에 교회 뜻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몇 세대를 걸친 장기적 안목으로 복귀섭리를 보아야 하며, 전략도 지상천국 건설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조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구 개개인들이 그간의 큰 부담이었던 “시간적 절박감”에서 해방되도록 해야한다. 이런 새로운 교회 문화가 식구 개개인들의 신앙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바람직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2. 현재의 교회 분열상은 건강한 세포분열이라는 긍정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  통일 보다는 각자 조직이 따로 건강하게 성장해, 나중에 연합하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하다. 각자 조직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길은 “유연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3. '참아버님도 그리스도다'는 문형진님의 새로운 통일신학적 해석은, 통일교가 세계 기독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하고, 성약적 기독교로 변신할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저의 이런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만이 (설사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속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역시, 성전교회가 저의 취향에 가장 가깝게 다가오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형진님을 지지하는 마지막 이유입니다.


# 제가 홀로서기 구도행각을 하면서 배운 좋은 지침이 하나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타마 붓다를 참 좋아하는데 (흠, 이것도 형진님과 통하네요),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물들이 있는데, 그 물이 바닷물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쉽게 구분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항상 짠 맛이 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세상에 수많은 이론들이 진리인 척 하는데, 그게 정말 진리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속에는 언제나 “자유함”의 맛이 나기 때문이다.  안정감의 맛도 아니고, 편안함의 맛도 아니다. 진리는 항상 자유함의 맛을 낸다.”


난 이 말이 하나님의 성령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에너지는 진리 그 자체이시니까요. 그 분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자유함을 느낍니다. 내 마음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유함을 느낀다면, 그때 우리는 성령을 감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냥 자유함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자유함"이어야 합니다. 자유롭기는 하되 긴장되고 불안하다면, 그것은 그냥 시간과 공간적 구속을 벗어난 몸만의 자유일 것입니다.  마음까지 자유로우려면, 우리가 어떤 절대적 신뢰와 충만한 자신감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즉, 내가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완전히 열려 있더라도 무탈할 것이다는, 삶의 전반에 대해 기본적 신뢰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설사 해를 입는다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불안을 털어 버리고 진정한 자유함을 느낄 수 있죠.


그런 기본적 신뢰와 자신감을 어떻게 해야 갖출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내가 직접 느낄 때만 가능합니다.  그 분의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들의 본성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죠. 당신의 성령의 보호하심이 마치 방패막처럼 강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움추린 가슴을 펼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가슴을 움추리나요? 불안하고, 두렵고, 숨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거나 숨기는 몸짓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방패막 아래서 불안이 없는 진정한 자유함을느낄 때, 내 마음은 비로소 “신의 평화” (Peace of God) 체험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우리 본성의 가장 이상적 상태이며, 가장 완전한 의식 상태입니다. 이러한 신의 평화가 자리잡은 우리 마음의 공간은, 두말할 필요없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일 것입니다.


# 원리강의를 재림론으로 끝내며 원리강사들이 흔히 인용하는 시 하나가 있죠?  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입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인데, 이는 원래 짧은 4줄로 짜여진 단 한 문장의 시(詩)였습니다. 타고
르는 일본을 세 번 방문했는데, 마지막 방문은, 캐나다로 가던 중 잠깐 들린 1929년이었죠. 이때, 동아일보 도쿄 지국장 이태로씨가 그를 만나 한국을 위한 시 하나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타고르가 예의상 써주기는 했지만, 역시, 갑자기 부탁을 받고 특별한 영감 없이 쓴 것이라 깊이가 없습니다. 일단 너무 짧아, 감상이고 뭐고 할 것이 없네요. 그래서, 몇몇 문학인들이 이와 어울리는 타고르의 다른 시 하나를 가져다 붙였습니다. 그 뒷 시가 명문이어서, <동방의 등불>은 항상 뒷 시와 같이 읽고 있습니다. 뒷 시가 그 유명한 <기
탄잘리> (신에게 바치는 노래)의 35번째 시입니다.  소제목은 따로 없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저의 현재 마음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이 시를 읊는 것으로 제 글을 맺을까 합니다; 상황에 맞게 마지막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저의 신앙고백을 끝내는 기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3주간에 걸쳐, 제가 올린 긴 글 셋을 끝까지 다 읽어주신 식구님들이 계시다면, 신앙의 동지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신을 향한 나의 기도-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인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 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 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일국으로
내 마음의 “성전교회”여, 꿋꿋이 나아가소서!


-을주환
 

   

 
00:01 new
아이고 참 세상은 넓고 가지가지 사람들이 많도다
 
 
00:02 new
부창부수
 
10:05 new
아하
 
 
00:38 new
식구들도 가지가지네, 이런 철없는 형진부부를 이해하려고 노력 많이하네, 그냥 통일가가 엉망으로 돌아가는거지
 
 
00:48 new
참부모는 메시아 보다
상위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예수님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부모는 4대성인 모든 교주와 과학자 철학자의 중심
으로 계시기 때문에
참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것입니다
철없이 하는 말 때문에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17:37 new
[을주환] 식구님과 제가 신관과 역사관이 다르니 토론은 불가능합니다, 쓰는 언어들이 다르니까요. 혹은, 같은 낱말이라도 다른 뜻으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의 그리스도 신관에서는 그 누구도 욕되지 않습니다. 다른 인간들의 가치를 올리는 것이 참부모를 상대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신다면, 그건 제가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걱정마십시오, 하고 싶어도, 세상 어지럽게 할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 아닙니다.
 
 
05:59 new
전의 글은 첫번째 것만 읽었고 지금 세번째 글을 막 읽었습니다.
둘째 글은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두 글의 공동점이 있습니다. 가슴보다는 머리로 쓴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을주환님은 형진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형진님쪽 사람인가요? 궁금하군요.
우리편이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우리편이기 때문에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더욱 채찍하는 사람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보편적인 언어로 바꾼 후 '문선명 아버님도 그리스도다'라고 말해야 편하다면 그리해야겠습니다.
설명은 잘 하셨네요.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그리스어이고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도.
유대이
 
17:12 new
[을주환] 글은 말과 달라 "보디 렝귀지"를 쓸 수 없으니 머리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가슴의 느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시를 써야하는데, 신학 주제를 이야기 하는데 시를 쓸 수는 없죠. 저는 형진님을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쪽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 그런 한국사람 아니네요. :-) 그리스도는 아버님을 이해하는 한 관점일 뿐입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절대 당신을 총제적으로 규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06:03 new
듀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님은 '왕'에게 기름을 붓는다고 설명했지만 그 이전 제사장을 그 중에서도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을 세울 때 거룩하게 하기 위해 기름을 부은 것에서부터 '기름부움을 받은 자'가 유래된 것입니다. 그 후에 사무엘이 첫번째 왕인 사울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그를 성스럽게 축복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왕에게 기름부음이 계속 된것입니다. 하여 유대인들은 아직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로마로 가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란 언어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버님은 보편적 언어인 '그리스
 
06:08 new
'그리스도'가 아닌 지극히 유일하고 특별한 언어로서의 예수님을 대신한 '다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 '재림주'라는 말이 '그리스도'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이유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통일교인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가 후천개벽시대를 맞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신'과 같은 영원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급은 다르지만 저급 영들의 원귀와 같은 원리입니다.
이 땅에서 다 하시지 못하셨기에 다시 영으로 나타나 일들을 진행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예수처럼 부활하지 않아도
 
06:13 new
된다라고 그렇게 섭리는 진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위해 사흘간의 죽음과 어둠 속에서 결국 그것들을 뚫고 사탄의 모든 참소를 뚫고 지구에 돌아와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일들의 기초를 세워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가 아닌 부활의 역사입니다. 그 부활을 이루어내기 위한 예수님의 집념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있는 을주환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사라져야 할 목록입니다. 저번 교황님이 방문하여 광화문 미사를 집례하실 때 손에 들고 계시던 지팡이(?) 꼭대기에 달려있던 예수님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립니다. 마치 금방 떨어질 것 같아 교황이 몸을 움직일
 
07:29 new
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더군요. 그런 아림은 그들은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십자가는 예수님의 아픔이라는 걸...
예수님의 부활을 '恨의 승화'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삼일간을 홍수때 죽은 인간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씀도 하신 걸 들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과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집념과 사랑이 만들어 낸 사건입니다. 그 사랑이 인류의 주 역사를 2,000년 동안 이끌어 왔습니다.
을주환님의 글이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런 종류입니다.
아버님을 보편화시키기 위한 노력 등등.
종교는 뜨거운 가슴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지, 이론이나 이벤트나 테크닉
 
06:25 new
테크닉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어차피 망합니다.
형진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 원인도 바로 그런 점입니다.
진실보다 테크닉이나 이벤트에 취했으며 아버지의 전통을 스스로 파괴하여 아버지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씌우려했다는 것입니다. 천복궁의 문화는 청평문화와 거의 다름이 없었습니다.
지금 형진님이 과연 얼마나 변하였을까? 과연 믿어도 될까? 불안불안 합니다만 미국으로 피난(?)하심은 형진님의 영혼을 위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부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테크닉보다 진실로 다가가 아버지를 증거하시는 형진님 부부가 되길 바랍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스스로 우상이 됨입니다
 
17:25 new
[을주환] 긴 댓글 올려 주신 것 고맙습니다. 저는 역사를 식구님이 설명하시는 것처럼 보지는 않지만, 그속에 담긴 식구님 자신의 진실성과 진지함은 존중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누구에 못 지 않게 형진님은 아버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법이나 증거하는 내용이 아버님의 유산인 가정연합의 교리와 문화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식구님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건 형진님도 아실 겁니다. 글쎄요, 전 당사자가 아니니 뭐라 할 것은 없고, 제 두번째 글에서 고백한대로, 성전교회가 나름대로 무럭무럭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중에 가정연합, 평화재단과 연합하길 더불어 바랍니다.
 
 
08:34 new
형진님은 회개하라는 말씀을 자주하십니다
회개의 첫번째는 중심이 내가아니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것입니다
두번째 회개는 절대선하신 하나님앞에 개끗하지 못한 나의 삶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중심이 하나님일경우 우상숭배자가 될수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되기 쉬우니까?
 
 
08:56 new
결국 형진님 홍보자였네...
 
17:27 new
[을주한] 지지자니까 홍보자라고 부르셔도 될 것 같은데, 직업으로 하는 "알바"는 아님을 확실하게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14:53 new
2세 중에 참으로 신선한 사람일세-
을주환씨 원리 쪼금 안다고 토를 다는 사람들 무시하고-
또 글의 내용보다는 누구편 사람이냐를 따지는 분파주의자들 무시하고-
자유롭게 느낀 점을 올리세요.
공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까-
그리고 종교 공부에 정진하세요.
하나님이 찾으실 때가 올 겁니다.
 
17:28 new
[을주환] 고맙습니다, 식구님. 네,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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